무향실(無響室)

Dead Room

Nira Pereg

Shimon Attie

Emilija Škarnulytė

Nira Pereg, 67 Bows, 2006, Single-channel video, 5 min. 51 sec., loop.

니라 페렉의 작품은 다큐멘터리적으로 자신만의 ‘놀이’ 를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페렉은 종종 사건을 본래의 것으로부터 낯설게 보이게 만드는 설치로 전시 공간 내에서 사건을 재현한다. 이 특별한 미적인 중개는 "있는 그대로"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강조한다.


20년동안 페렉의 작업은 이론과 현실, 그리고 정신과 물질간의 관계로 부터 나오는 질문들을 다루었다. 그녀의 작업은 행동의 매커니즘을 밝히는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행동의 매커니즘은 윤리학적,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지정학적 경계에 모두 걸쳐있다. 이 경계의 공간들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 구조의 사회적 표현
에 대한 페렉의 관심과 참여를 위한 기반의 역할을 한다.

 
그녀의 작업은 세계적으로 전시되었고,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PS1,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녀는 현재 텔아비브에서 작업하고 있다.

Nira Pereg’s multichannel video installations challenge the status quo of any territory she immerses herself in. She anchors her work in documentary practice, developing her own “play of resolutions''. Pereg often employs multichannel presentations which both estrange the events from their origin, and “reenact” them within the exhibition space. This particular aesthetic intervention heightens a constant discomfort with “the way things are”. 


Over the past 20 years Pereg’s work dealt with questions that emerge from the unavoidable synergy of spirit and matter, theory and practice. Her work both reveals and questions behavioural protocols, as they coexist in liminal spaces of geopolitical, religious, ideological and ethical importance. These border zones serves as a 
platform for Pereg’s interest and involvement in the social manifestations of power structures which influence our lives.


Her work has been exhibited worldwide, and is represented in the collections of many museums, including the Center Pompidou Paris, PS1 New York, Hirshhorn Museum USA, ZKM Karlsruhe, The Israel Museum, Jerusalem, Tel Aviv Museum of Art, The national Gallery of Canada, .Princeton University and TATE modern, London. She currently lives and works in Tel Av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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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카를루스 동물원을 방문하여 영감을 얻은 <67 Bows(67번의 경례)>는, 감상자의 불안을 조성한다. 이 작품을 위해 페렉은 동물원의 플라밍고 무리를 관찰하는데에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단 행동이 기대되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새들 각각의 특정한 행동을 발견하였다. 다양한 카메라 앵글을 통해 그녀는 이 이국적인 동물이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풍성한 클로즈업 샷을 보여준다. 새의 꽥꽥거리는 소리들 위로, 그녀는 간헐적인 자극적 사운드를 추가하여 인간이 그들의 평화로운 영역을 교란시킴을 보여준다. 이 결과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67 Bows” (2006), inspired by the artist’s visits to the Karlsruhe Zoo in Germany, demonstrates that transformation with disquieting effect. For this piece, Pereg spent time studying a flock of the zoo’s flamingos. She discovered particular qualities in the behavior of individual birds by setting up situations in which group responses were expected. Employing various camera angles, the artist offers sumptuous close-ups of these exotic animals calmly going about their instinctual business. Over the muffled noise of the birds’ squawks and clucks, she adds a provocative soundtrack of intermittent, startling noises, implying human disturbance of their peaceful realm. The result evokes a sense of suspense in the viewer, while calling into question the relationship between what is seen and heard.

Shimon Attie, The Crossing, 2017, Single-channel video with 4.1 sound, 7 min. 59 sec.

시몬 아티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트랜스 미디어 작업으로, 렌즈 기반의 설치 미술과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 또는 다중 채널의 거대한 비디오, 다중 매체 설치, 예술 사진, 사회적 실천, 조각, 퍼포먼스, 공공 프로젝트 등이다. 그의 작업 중 상당수는 공개된 장소에 전시되었으나, 또 어떤 것들은 전통적인 장소인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그의 작품은 현대의 매체들이 어떻게 공간, 시간, 그리고 자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재생산 되는가를 탐구하며, 보이지 않는 것, 잊혀진 것, 지워진 역사 등에 형체를 부여하는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또한 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소외되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은 지역 사회 구성원들을 참여시켜 그들의 역사와 기억, 현재와 잠재된 미래를 대변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파리 퐁피두 센터 등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My artistic practice may best be described as trans-media in nature, combining primarily lens-based practice with Installation art. More specifically, my work spans creating single and multiple channel immersive video and mixed media installations, art photography, social practice, sculpture, performance and public projects. Many of my works are conceived for public sites, while others are created for more traditional venues such as art museums and galleries. Broadly 
speaking, much of my work explores how a variety of contemporary media may be used to reimagine new relationships between space, time, place, and identity. More specifically, some of my practice involves creating site-specific media installations that give visual form to invisible, forgotten or erased histories and/or communities in the physical landscape of the present. While in other works, I engage local communities which have been marginalized and/or traumatized, to find new ways of representing their history and memory, present and potential fu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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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아티의 <The Crossing(더 크로싱)>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일곱명의 젊은 남녀가 카지노에서 룰렛에 몰두하는 장면을 천천히 펼치는 일종의 회화(tableaux)이다. 일곱명의 남녀는 시리아 난민으로, 최근에 유럽에 정착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고작 몇 주전 지중해를 
뗏목으로 건너왔으며, 공연이나 연기 경험이 전무했다.

 

더 크로싱에서 펼쳐지는 이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참여자의 개인적인 망명과 탈출의 경험에 기반해있다. 그들이 룰렛판에 둘러앉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동안에, 그들은 정신적으로 부재한다 - 그들의 무표정한 표정, 느린 움직임, 그리고 침묵이 그들의 운명의 잔인함을 상기시킨다. 영상 내내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으나 사운드 트랙은 변화 하는데, 때로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나 불안한 심장 박동, 룰렛 공의 튕기는 소리나 테이블 매트 위의 손톱을 움켜쥐는 소리가 전달된다. 오로지 카메라와 룰렛의 움직임만이 존재하는 가운데 각 참여자는 천천히 기계적으로 "내기를 거는" 자세를 취한다. 장면이 지날때마다, 한 사람씩 아무런 흔적이나 설명도 없이 사라진다. 영상이 끝날 때 쯤,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죽거나 살아서 남겨진 수천 명의 생존 기념비일 것이다. 아티는 현대 미술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민자들이 위기의 시기에 문자 그대로 그들의 삶을 위해 도박을 하도록 강요 받는 특별한 위험을 반성하게 한다.

Shimon Attie’s The Crossing unfolds as a series of slow-moving tableaux in which a group of seven elegantly dressed young men and women are inside a casino engrossed in a game of roulette. 
The seven players are Syrian refugees who have recently arrived in Europe, many on rafts over the Mediterranean just weeks before the filming with no performing or acting experience.


The metaphorical tale that unfolds in The Crossing is based on the participants’ individual experiences of exile and flight. While they appear physically present during the rounds of roulette, they are mentally absent—their deadpan expressions, slow movements, and silence evoke the brutality of their fate. No words are spoken throughout the film, and the soundtrack varies, sometimes conveying stormy seas or the pounding of an 
anxious heartbeat, at others, the ricochet of the roulette ball or gripping fingernails onto the table mat. Each participant holds a static pose, with the only movements coming from the camera, 
the spinning roulette wheel, and the participants themselves as, one by one, they slowly and robotically “place their bets.” With each passing tableau, one person disappears from the game without a trace or explanation. By the film’s end, only one participant remains, perhaps a living monument to the thousands who have been left behind, dead or alive. Attie has stated that The Crossing uses the language of contemporary art 
to reflect on the extraordinary risks migrants are forced to take in times of crisis, literally gambling for their lives.

Emilija Škarnulytė, Aldona, 2013, Film, 16 mm, HD, 13 min.

에밀리아 슈카르눌리테는 리투아니아 출생의 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이다. 그녀는 다큐멘터리와 환상 사이에서 작업하며, 우주, 지질학에서 생태, 정치에 이르기까지 깊은 시간과 보이지 않는 구조를 탐구하는 영상과 설치물을 만든다.

 

그녀의 작품에서, 그녀의 눈먼 할머니는 풍화된 소련 독 재자들의 동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중성미자 검출 기와 특정 충돌기는 다른 세계의 구조로 우주를 측정하 기도 한다. 또한 포스트 인류는 북극권 위의 해저 터널 을 헤엄치고 중동 사막의 지각 단층선을 기어 다닌다. 슈카르눌리테는 제 22회 트리엔날레 디 밀라노에 리투아니아 대표로 참가했으며, 2018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발트 파빌리온에 선정되었다. 테이트 모던, 빌 니우스 국립 미술관, 덴 프리, 쿤슬러하우스 등에서 개 인전을 가졌으며 볼룸 마르파, 서울시립미술관, 카디스트 재단 등에서 단체전을 가졌다. 그녀의 영상은 IFA, 카 디스트, 퐁피두 센터 등에 소장되었다. 그녀는 노르웨이 트롬쇠에 위치한 아날로그 영화 그룹인 폴라 필름 랩의 설립자이자 공동 연출자이다.

Emilija Škarnulytė is an artist and filmmaker. Working between documentary and the imaginary, Škarnulytė makes films and immersive installations exploring deep time and invisible structures, from the cosmic and geologic to the ecological and political. Her blind grandmother gently touches the weathered statue of a Soviet dictator. Neutrino detectors and particular colliders measure the cosmos with otherworldly architecture. Post-human species swim through submarine tunnels above the Arctic Circle and crawl through tectonic fault lines in the Middle Eastern desert.

 

Winner of the 2019 Future Generation Art Prize, Škarnulytė represented Lithuania at the XXII Triennale di Milano and was included in the Baltic Pavilion at the 2018 Venice Biennale of Architecture. With solo exhibitions at Tate Modern (2021), Den Frie (2021), National Gallery of Art in Vilnius (2021), and Kunstlerhaus Bethanien (2017), she has participated in group shows at Ballroom Marfa, Seoul Museum of Art, etc. Her numerous prizes include the Kino der Kunst Project Award, Munich (2017); the National Lithuanian Art Prize for Young Artists (2016). Her films are at IFA, Kadist Foundation and Centre Pompidou collections and have been screened at the Serpentine Gallery, UK, the Centre Pompidou, France. She is a founder and currently co-directs Polar Film Lab, a collective for analogue film practice located in Tromsø, Nor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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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봄, 알도나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녀의 시신경은 독에 중독되었는데, 의사는 아마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때문일 거라고 했다. 이 영상은 알도나의 일상을 따라 그루타스 공원을 간다. 그루타스 공원은 리투아니아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인 드루스키닝카이 근처에 있는, 소비에트 시대의 조각상들이 있는 공원이다. 기념비적 조각상들을 그녀의 주름진 손으로 읽어내며, 그녀는 용서와 부드러움의 손짓으로 과거와 현재를 어루만진다. 눈먼 예언자는 오래된 도상이다. 그들은 눈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때로 더 본다.

In the spring of 1986, Aldona lost her vision and became permanently blind. The nerves in her eyes were poisoned. Doctors claimed that it was probably due to Chernobyl’s Nuclear Power Plant explosion. In the film we follow Aldona on her daily journey to Grūtas Park, a sculpture garden of Soviet-era statues and relics near Druskininkai in the southwest of Lithuania. By reading the wrinkled surfaces of the monumental sculptures with her hands, she touches both the past and the present: a gesture of forgiving and tenderness. The blind seer is an old archetype. They are blind, yet they can see more than we can.

무향실(無響室)

공학적 목적으로 최대한 조용히 만든 방을 무향실(無響室, Dead Room)이라 하는데, 여섯 개의 벽면이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 이 방에서는 소리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존 케이지, <사일런스>, 8p

침묵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음'이다. 소리와 침묵은 일견 서로의 개념적 대립항인 듯 보인다. 그러나, 소리를 침묵과 실제로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언제 나 실패한다. 존 케이지는 무향실에서의 경험을 통해 소리와 침묵, 주관과 객관, 의도 와 비의도의 이분법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소 리도 없어야 할 무향실에서 들은 소리는 듣는 주체인 자기 자신의 소리였다. 소리 아니 면 침묵의 이항대립이 사라지고, 제 3의 소리 - 듣는 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 소리 - 가 남는다.

 

   오늘날 전쟁은 제 3의 소리처럼 계속된다. 종식된 것은 고전적인 의미의 전쟁이며, 현대사회의 전쟁은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국가간의 전면전이 아닌, 집단 간의 국지전의 형태로 벌어지는 이 새로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항적 질서체계 의 해체이다. 전시 국제법의 가장 중요한 성취였던 전투원과 비전투원 사이의 구별이 허물어지고, 전쟁과 평화 사이의 분명한 구분도 무너졌다. 전쟁 아니면 평화, 국가 간 전쟁 아니면 내전, 제 3항은 없던 체계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전쟁도 평화도 아 닌' 이러한 제 3의 평화 - 살아남은 이들의 평화 -는 낮은소리와 높은소리로 계속된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듣는 이가 있는 한 계속 될 것이다.

   

   니라 페렉의 는 동물원에서의 지속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동물원에서 67번의 총성이 울려퍼지는 동안, 홍학들은 경례를 하듯 고개를 숙이는 독특한 행동을 보인다. 이 작품은 강렬한 총성으로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전쟁 을 연상시키며, 소리와 전쟁/침묵과 평화의 이항 중 명백히 한 항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스라엘 출신인 작가의 배경을 고려할 때 이는 더욱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반복 되는 67번의 총성 속에서, 우리는 총성 그 자체가 아닌 총성 직전의 침묵에도 반응하 는 홍학의 행동을 목격한다. 총성 직전의 침묵에도 몸을 움찔거리는 홍학의 모습을 보 며, 실제로 폭력이 행해지지 않는 침묵의 순간에도 홍학에게 계속해서 가해지는 폭력 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제 3의 평화 – 혹은 제 3의 전쟁 – 을 떠올리게 한다.

   시몬 아티의 은 난민들을 배우로 기용한 작품이다. 배우들은 내 전을 피해 유럽으로 갓 정착하였으며, 연기 경험이 전무했다. 카메라는 느리게 이동하 며 천천히 배팅하는 배우들의 무표정한 표정을 포착한다. 실제로 생명을 '걸고' 탈출한 이들에게 가상의 '배팅'을 이끌어내며 아티는 은유적으로 진실에 접근한다. 이 작품에 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침묵이다. 영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청 각적 침묵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표정도 읽어낼 수 없는 시각적 침묵 또한 지속된다. 그리고 이 침묵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침묵 속에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내기가 진행될 수록 한명씩 소리없이 사라진다. 오로지 그들의 운명의 룰렛판이 돌아가는 소 리만이 화면을 압도하는 이 조용한 폭력은 난민들이 처한 전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에밀리아 슈카르눌리테의 는 작가의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전쟁의 단면을 직접 보여주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이 냉전 종 식의 직간접 원인이 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최악의 원 전 사고로 꼽히는 체르노빌 사건의 피해자인 그녀의 일상은 우리의 그것과 별로 다르 지 않다. 우리는 그녀가 능숙하게 손을 씻고, 과일을 깎고, 산책하는 모습을 천천히 바 라보며 그녀의 일상이 익숙한 평화로움을 되찾기 이전의 삶을 상상해보게 된다. 소비 에트 시절 영웅들의 동상이 있는 공원을 산책하며 동상을 어루만지는 알도나의 손길 은 마치 용서를 담은 듯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알도나가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매체인 라디오에 나오는 동화의 내용은 자못 의미 심장하다. 자신을 배신하고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하는 공주에게 어부는 설명을 요구하 지만, 공주는 침묵한다. 무표정하게 침묵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비추며 주어지는 이 이 중의 침묵은 알도나가 감내해야 했던 폭력의 결과를 상기시킨다. 전쟁은 끝났으며 그 녀는 살아남았으나, 폭력은 결과로서 계속되고 있다.

한수정 / 제15회 부산국제비디오아트페스티발 협력 큐레이터

Dead Room

A room that has been made as quiet as possible for engineering purposes is called a dead room, and in this room where the six walls have been made with a special material, sounds do not reverberate. A few years ago, when I was inside a dead room at Harvard, I heard two sounds. One was high-pitched, and one was low-pitched. When I described this to the engineer in charge, he explained to me that the high-pitched sound was the sound of my nervous system operating and the low-pitched sound was the sound of my blood circulating. Sounds will not leave me until I die. And sounds will continue after I die.

John Cage, <Silence>, 8p

The definition of silence is ‘being quiet without speaking’. At a glance, sound and silence seem to be conceptual opposites. However, attempts to separate sound from silence always end in failure. John Cage confesses that in the dead room, he experienced a disappearance of the dichotomy of sound and silence, of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and of intent and non-intent. The sounds that he heard in the dead room which was supposed to be objectively soundless were the sounds of himself - the listening subject. The binary opposition of sound or silence is gone, and a third sound – the sound that never goes away as long as the listener is there – is left.

 

   Today, war continues like the third sound. It is only war in the conventional sense that has come to an end, and the war of comtemporary society persists in a new form. The most prominent feature of this new war, which is taking the form of local skirmishes between groups rather than all-out battles between nations, is the deconstruction of the binary system of order. The distinction between combatants and noncombatants, which was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 of international law in time of war, is falling apart, as is the clear line between war and peace. War or peace, international war or civil war, systems without a third side no longer serve any function. This third kind of peace that is ‘neither war nor peace’ - the peace of the survivors – continues in low and high sounds. As long as there is someone listening, it will continue even after we’re gone.

 

   <67 Bows>by Nira Pereg is a film made through continuous observation and experimentation at a zoo. While 67 gunshots are fired at the zoo, flamingos exhibit a peculiar behavior of lowering their heads as if bowing. This work brings the image of war to the minds of the audience with piercing gunshots, and seems to clearly display one side of the dichotomy of sound and war / silence and peace. This seems more convincing when we consider the Israeli background of the artist.

   But amidst the 67 reiterating gunshots, we observe the flamingos responding to not just the gunshots themselves, but also to the silence before the gunshots. The sight of the flamingos flinching during the silence before the gunshots tells us that even in the moments of silence when no actual violence is being done, the flamingos are still suffering from violence. What we are living today is neither war nor peace, but a third kind of peace – or a third kind of war.

 

   <The Crossing> by Shimon Attie is a film where refugees were hired as actors. The camera moves slowly and captures the expresionless faces of the actors slowly placing their bets. By bringing out virtual ‘bets’ from people who actually ‘bet’ their lives to escape, Attie approaches the truth metaphorically. The most distinguishing feature of this film is silence. In addition to the auditory silence of no one speaking during the running time, a visual silence persists where it is impossible to read anyone’s face. And this silence is far from peace. Their fates are decided in this silence and calm, and they disappear one by one as the bet progresses. This quiet violence where only the sound of the roulette of their fate spinning overwhelms the screen in silence bluntly showcases an aspect of the war that the refugees face.

 

   Lastly, <Aldona> by Emilija Skarnulyte is named after the director’s grandmother. deals with the Chernobyl accident that resulted in the end of the Cold War. Despite being a victim of the Chernobyl accident, known as the worst nuclear accident in history, her everyday life is not much different from ours. As we slowly watch her adeptly wash her hands, peel fruits, and take promenades, we come to imagine her previous life when it must have been like war, before her daily life returned to its familiar peacefulness. When she walks through the park containing statues of heroes from the Soviet age and touches the statues, her touch looks soft and careful, as if conveying forgiveness.

 

   The children’s tale coming from the radio, which is the only media that Aldona can enjoy, is rather significant. The fisherman demands an explanation from the princess who betrays him and marries the prince of a neighboring country, but the princess remains silent. As Aldona’s expressionless silence is portrayed on the screen, this double silence reminds us of the violence that Aldona had to endure. This is the aspect of violence that continues despite the appearance of a peaceful daily life. The war is over and she survived, but the violence remains as a consequence.

Sujeong Han / Co-curator of the 15th BIVAF